기곡의 바람. -본편 5-

기곡의 바람. -본편 4- 에서 이어집니다.

여기서 일단 본편은 마감. 다음은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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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광경은 조운의 눈에도 보였다.

자신이 소수의 추격대와 교전하는 사이 적진에서 뛰쳐나온 별동대가 빠르게 자신을 지나쳐 퇴각하는 아군의 후미를 잡았다. 이윽고 후속하는 적부대가 호응하여 순식간에 아군 일각을 반포위하는 형세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포위되어 가는 아군의 형세가 손에 잡힐 듯 보였다. 이대로라면 무너진다. 그리고 돌파를 허용한다면 그 뒤는 걷잡을 수 없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며 사방이 꽉 막혀버리는 듯한 답답함에 휩싸였다. 사방의 공기가 마치 납덩이 같이 내리누르는 감각. 저편의 아군은 이렇게나 똑똑히 보이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지잉 하고 이명이 울리며 주변의 소리마저 차단되었다.

근처에 있다가 급하게 달려온 등지가 옆에서 뭐라고 악을 쓰는 것 같았지만 도무지 들리지 않았다.

등지는 지금까지 잘 해 주었다.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다. 그에게는 풀어지지 말라고 핀잔을 주었건만, 정작 나 자신이 안일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지금까지 애써 감춰온 피로가 무의식 중에 시야를 좁힌 것이었을까.

변명이다. 출구가 바로 저기라는 생각에 이번에도 하던 대로 하면 될 거라고 방심한 사람이야말로 바로 나 자신이 아니겠는가. 높은 나무는 역시 다 내려오기 직전이 가장 위험한 법이다. 아니, 알고 있으면 무얼 하겠는가. 실제로 이렇게 되었는데.

아까부터 뭐라고 악을 쓰던 등지가 이젠 숫제 갑옷을 두들겨 가며 뭐라 소리치고 있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등지가 이 전장을 이십년 전 당양 장판벌의 싸움에 빗댄 적이 있었던가.

좁고 먼 혈로를 향하는 우리의 뒤를 적은 매섭게 몰아붙여 왔었다. 지금 눈앞의 상황도 역시 그와 같은 듯했다. 하지만 그 때는 모두가 있어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지금은 모두 가고 양편이 절벽에 막힌 이 계곡에 나만 홀로 서 있다.

모두가 있었던 그 때, 모두는 그 사람과 함께 같은 꿈을 살고 있었다. 장판에서 조조에게 따라잡힌다는 것은 그 꿈이 끝나는 것을 의미했다. 그 때 모두는,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꾸는 꿈을 끝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그 때 꿈은 이어졌었다.

이제 꿈꾸던 이들은 갔다. 여기서 홀로 내가 스러져 모두의 뒤를 따르면, 나와 함께 그 잔광도 스러질 것이다.

"아니."

아니다. 홀로 남은 잔광이 아니다. 그건 이 계곡 양편을 틀어막는 절벽이 눈을 가려 만든 착각이다. 문득 옆으로 고개를 돌려 높은 절벽을 돌아본다. 수 겹 절벽 너머 두터운 산맥의 저편에서, 같은 꿈을 그 사람에게서 함께 물려받은 이가 지금, 한천(漢川)을 향해 내달려 오고 있다. 그 광경이 너른 산맥을 꿰뚫듯이 달려들어 뇌리에 박혔다.

꿈은 아직 이어지고 있다. 나와 함께 꿈꾸고 또 나보다 오래 꿈꾸어야 할 사람이 아직, 저편에 있다. 꿈을 꾸어줄 사람이 남아있는 한, 이 계곡에서 그 꿈이 끊어지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직 조조에게 따라잡혀 줄 수는 없다.

앞에 간 사람이 없다면 앞에 간 사람의 역할을 누군가 하면 될 일이다. 지금 이미 없는 것은 당장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 막 잃으려는 것은 당장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다.

꿈을 잇기 위해 지금 무언가 필요하다면, 전설이든 무엇이든 만들어 주는 것이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일이다. 선인의 몫을 합쳐 부풀려진 명성 또한, 비록 거추장스럽더라도 필요하다면 스스로 만들어서라도 걸쳐 주어야 할 테지.

".....장군!"

주변에 소리가 돌아왔다.

문득 등지를 돌아보며 말을 건네었다.

"백묘, 관장군이 안량을 베어 백마의 에움을 풀어낸 일화를 혹 아는가?"

뜬금없이 던져진 말이었겠지만 그답게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아, 네, 뭐 그야, 그것도 전설 아닙니까. 홀로 원소의 대군을 뚫고......"

"그랬지."

대답과 동작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멀리서 위군 별동대의 대장기를 확인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나갔다. 겹겹이 막아서는 병사들을 뚫고 그 사이에 있는 대장을 찔러죽이고 목을 베었다. 나아가도 돌이켜도 상대편에 자신의 기세를 능히 당할 자가 없었기에 위군은 하는 수 없이 포위를 풀었다. 

"장군! 무모하십니다!"

급히 부대를 이끌고 밖에서 호응해온 등지가 소리쳤다.

"뭘. 한 손으로 할 만한 일일세."

짐짓 호기롭게 대답해 본다.

"하기사, 따지고 보니 뭐 십만도 안 되지 않습니까."

아까의 당황스런 모습은 감쪽같이 감추고 대뜸 되받아친다. 정말이지, 한 마디도 안 지려는 사람이다. 허나 지금은 그 호기가 오히려 든든했다.

등지에게 후군의 퇴각을 맡기고 전면에 집중했다. 별동대의 전열이 흐트러지자 적진 전체가 순식간에 어지러워졌다. 이쪽이 사실상 전체의 본대인 모양이었다. 수 차례 베고 찌르고 휘두르며 적진을 휘젓는 사이, 깔때기의 남은 부분은 깔끔하게 비워졌다. 모두가 무사히 물러나고 직속부대까지 뒤로 보낸 뒤, 홀로 기곡도의 입구에 말을 멈추었다. 

적진을 향해 말머리를 향하고 눈을 부릅뜨며 창을 비껴들었다. 아, 어쩌면 그 때 장판교에 서 있던 그 또한 일껏 기세를 올리면서도 사실 속으로는 조금 겸연쩍어하고있지 않았을까. 마치 일부러 눈을 한층 부릅뜨려는 지금의 자신처럼. 하지만 해야 되니까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나도 지금, 이것을 해야 하니 그저 할 뿐이다.

기곡도의 안쪽에서부터 맹렬한 바람이 불어와 등뒤를 때린다. 가없이 뜨겁고도 더없이 시원한 바람이다. 장대한 꿈과도 같은 강렬한 바람이 전포 자락에 넘쳐흘러 온몸이 부풀어오른다. 바람에 휩쓸리는 애마의 갈기가 불꽃처럼 피어오른다. 넘치는 바람이, 적진 뒤로 이어진 아득한 계곡 저 너머까지 이 외침을 실어보낸다.

"내가 상산 사람 조자룡이다! 누가 나와 같이 생사를 걸고 싸워 보겠는가!"

지금 나는, 원없이 꿈을 살고 있다.



-절대평범지극정상인-

by windxellos | 2015/12/03 15:03 | 삼국지 | 트랙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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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기곡의 바람. -에필로그-
기곡의 바람. -본편 5- 에서 이어집니다. 길어졌어. 생각보다 너무 길어졌어. ------------------------------------------- 조진은 병사를 물렸다. 잔도를 홀로 막아선 노장의 외침에, 어느 누구도 감히 달려들어 덤비지 못했다. 조운이 잔도 안으로 사라지고, 이윽고 이쪽도 곧 병사를 물렸다. 잔도로 돌입하자는 의견을 내는 부장도 있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여기서 적의 후미를 붙잡지 못한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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