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곡의 바람 -본편 3-

기곡의 바람 -본편 2- 에서 이어집니다.

짧게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길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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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은 약간 초조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아군은 아직까지 승세를 타고 있다고 해도 좋았다. 적의 첫 방어진은 그리 큰 어려움 없이 돌파했다. 돌파 후 첫 추격전 때 나름 세심하게 부대 출동 순서를 지정해 가며 계속 이어간 추격이 적이 준비한 내부 방어선 때문에 잠시 꺾였던 것은 좀 아쉬웠지만, 그 내부 방어선도 그리 오래지 않아 돌파할 수 있었다.

그 날은 날이 저물어 거기에 그쳤지만 다음 날 적의 3선과 4선도 돌파했다. 그리고 사흘째에 적의 5선을 돌파해 이제 6선째에 맞대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 이 밤인 것이다. 좀더 들이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진해 갈수록 골짜기의 폭이 줄어들면서 아군의 공격 정면이 좁아지고 적진도 폭이 줄어든 만큼 두께가 두꺼워진 탓에 시간을 더 잡아먹게 된 것 같았다.

양군 모두 그리 넓지도 않은 곳에서 대낮같이 횃불을 밝혀둔 탓에 서로 야습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경계를 풀지는 않았다. 사실 상대의 야습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아직 충분히 여유가 있는 아군이 이 지세와 조명 탓에 야습을 걸어보기 어려운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시간이 생각보다 소모된 것, 야습이 어려운 것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 느끼고 있는 다소간의 초조함은 그것이 아닌, 좀 다른 곳에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 것 같았다. 순조롭게 이기고 있는 내가 왜 초조함을 느껴야 하는 것인가. 첫날부터 느껴졌던 약간의 거슬림 같은 기분이 지금은 작지만 무시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자라 있었다.

그리고 사흘째 그 거슬림을 품어가며 싸워온 이 밤, 지금까지의 전과를 결산해 보면서 그 편치 못한 기분의 원인을 온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순조롭게 이기고 있지만 실상은 순조롭지 않은 것이다.

적의 방어진은 순조롭게 돌파하고 있다. 하지만 이 추격의 진짜 목적, 다시 말해 적군에 대한 결정적인 통타를 도무지 먹일 수가 없는 것이다. 첫날에는 방어선을 돌파하고 추격을 이어간 것만으로 만족해서 크게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틀째를 똑같이 보내고 사흘째 밤을 맞게 된 지금, 이 시점에서 바라던 전과와 실제로 지금까지 거둔 전과의 간격을 돌이켜 재어 보니 이젠 초조해하는 자신의 모습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방어선을 돌파할 때의 수순은 늘 같았다. 적의 방어선이 무너져 퇴각하면 추격대를 내보낸다. 당연히 적의 후미가 응전한다. 여기에 맞서 다수인 아군은 추격부대를 계속 교대시켜 지정하여 끊이지 않고 접적상태를 유지시켰다. 차륜전이었다. 이를 지속하여 상대의 소모를 강요하고, 피로가 누적되었을 때 일거에 들이칠 심산이었다. 

추격대의 순환 운용 자체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세심한 판단을 거쳐 나름 자신있게 구성한 부대편성과 시기에 맞춘 적절한 출격지정으로 부대를 계속 순환시켜 가며 적군의 다음 방어선이 나올 때까지는 거의 무한정한 추격을 이어갈 수 있었다. 문제는 상대의 후미가 대체 언제 소모되고 피폐되는 것인지, 이것이 영 가늠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적군은 방어선이 무너질 때마다 늘 조운이 뒤를 막았다. 듣기로나 보기로나 언제 자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노인인데, 참 기력이 대단하다 싶었다. 매 추격 때마다 교대로 달려드는 아군의 예봉을 부대 교체도 없이 계속 되튕겨 가며, 벌써 다섯 번째 아군의 차륜전을 막아내면서도 도무지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

덕분에 아군은 계속 적의 방어선을 돌파해 나가면서도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가 없었다. 서로 창칼이 오가는 만큼 추격 과정에서 적에게도 작으나마 계속 소모를 주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으나, 그만큼의 성과를 내기 위한 아군의 소모도 적보다 크면 컸지 작지 않았기 때문에 전과로서 내세울 만한 것은 못 되었다.

결국 저 조운의 후미부대를 어떻게 하기 전에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앞으로 몇 개의 방어선을 더 돌파한다고 해도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옴쑥 하고 오한이 들었다.

적의 방어선은 점점 뒤로 물러나고 있다. 그러나 더 뒤쪽, 방어선 뒤쪽의 적진 가장 깊숙한 곳은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전진한 거리를 계산하면 이미 기곡도의 입구까지도 그리 멀지 않은 지점에 와 있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추격을 시작한 지 이미 사흘이 지났다. 아침이 밝으면 이제 나흘째가 된다. 곧 뻗어버릴 것만 같은 노인이 지금도 막아서고 있는 저 뒤편은, 지금 어떻게 되어있는가. 어쩌면, 이미 완전히 비어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애써 도리질을 쳤다. 미에 있을 때 관측한 적의 수와 물자의 규모, 그리고 기곡도의 폭을 감안하면 사나흘에 전부 다 완전히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내버리고 도주에만 전념한다면 어찌 될지도 모르겠지만, 적 후미의 이 끈질김을 보아서는 아무래도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기회는 있다. 분명 제대로 통타를 가할 기회는 온다. 어차피 적이 만든 이 방어진의 맨 뒤에는 기곡도의 입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방어선을 칠 수 없는 그곳까지 늦지 않게 달려갈 수만 있다면, 분명 그 때 기회가 올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와 같은 방법은 아마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적군이 소모되기를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조운이 지휘하는 적군의 후미는 어디까지나 수동적으로만 이쪽에 대응해 오고 있었다. 목적이 시간을 버는 것이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기력을 보존해 가며 싸우기 위해서인지, 절대 먼저 덤벼들지 않고 아군이 접촉하려 할 때만 사납게 대응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는 잘 통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리고 앞으로도 잘 통할 것이라고 안심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잘 통해 왔다고 믿고 있는 이상 아마 다음 방어선에서도, 다다음 방어선에서도 그는 똑같이 나올 것이다. 내 승기는 바로 거기에 있다.

초조함이 걷히고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준비를 진행한다면, 이번 방어선에서는 어렵겠지만 아마도 다음 방어선 즈음에는 확실히, 그 노인에게 제대로 일격을 먹여줄 수 있을 것이다.   



-절대평범지극정상인-

by windxellos | 2015/12/03 12:09 | 삼국지 | 트랙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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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기곡의 바람. -본편 4-
기곡의 바람 -본편 3- 에서 이어집니다. 정말로 원래는 좀더 짧게 적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이죠. -------------------------------------------------- 조운은 여섯 번째의 추격을 물리치고 일곱 번째의 방어진으로 막 들어온 참이었다. 여섯 번째의 방어진에서는 위군이 전에없이 소란스레 덤벼들어 왔었다. 그전까지는 격렬해기는 해도 계산을 두고 공격해 오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꽤나 소란스러운&nbsp......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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