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곡의 바람 -본편 2-

기곡의 바람 -본편 1- 에서 이어집니다.

역시 개그로 나갔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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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은 방어진으로 몰려드는 위군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전투는 격렬했다. 승세를 타고 밀려오는 위군의 공세는 드셌고, 남긴 병력만으로 이들을 맞이하여 싸우는 것은 예상대로 꽤나 힘겨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다들 잘들 싸우고 있군요."

지휘에 골몰한 조운의 등뒤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발대로 보냈던 등지였다.

돌아보는 조운과 눈이 마주치자 등지가 말을 이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얄미울 정도로 느긋한 말투였다.

"선발대 쪽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다 편성해서 순서대로 쭉쭉 가기만 하면 되니까요. 남은 건 서기들한테나 맡겨둬도 될 겁니다."

"잘 했네. 헌데 그렇다 쳐도 뭐하러 온 건가."

"아시다시피 제가 좀 겁이 많아서 말이죠. 지금 이 바닥에서 제일 안전한 데를 찾자면 아무래도 역시 조 장군님 옆이 아닐까 싶어서 염치 불고하고 찾아왔지요."

그럴 리 없다. 백관을 늘어세우고 기름 가마를 걸어 한껏 위세를 부리던 손권과 오의 조정 앞에 홀로 서서 태연히 눙을 치고 나올 수 있는 남자가 겁쟁이를 자처한다 한들 설득력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안전하기로 따져도 후미 최전선의 자기 옆보다는 기곡도 입구의 선발대 근처가 한결 나을 것이다.

"실없는 소리 말게."

"에이. 무슨 말씀을 또 그렇게 하십니까. 목숨이 아까워서 이렇게 착실하게 대비도 하고 왔는걸요."

아마 등지가 온 진짜 목적은 직접 데려와 뒤에 도열시켜 둔 저 노병(弩兵)들에 있을 것이다. 수송 여력의 한계로 사람이 모자란 가운데 고심해서 차출해 보태주러 온 것이리라. 그 마음씀이 고마웠다. 

"어디보자. 이 자리는 전망이 별로로군요. 좀더 앞으로 나가볼까나."

아니면 타고난 천성이 그냥 위험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는 전장이네. 너무 경박하게 굴지 말게나."

"장판에서 단기로 조조의 이십만 대군을 쓸어버린 장군께서 옆에 계신데 뭐 걱정할 게 있겠습니까."

"허, 또 그 이야긴가. 내 그게 아니라 누차 말한 바 있거늘."

모두가 살아있었을 무렵, 장판에서 조운은 추격해 온 조조군의 기병대 수천 사이에서 아두를 보호해 온 바가 있었다. 모두 조조가 본군에서 골라 보낸 정예였다. 당연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무공일 것이나, 시간이 가며 소문이 부풀어 지금은 마치 홀로 조조의 이십만 대군 전부를 뚫고 다니며 종횡무진한 것처럼 되어 있었다. 꽤나 겸연쩍은 일이었기에 조운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정정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 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족히 이십년은 다 된 일인데 뭘 그리 틈만 나면 꺼내드나 그걸."

"이십년이나 됐으니까 이젠 한껏 떠들 만도 하지 않습니까. 이야기가 전설이 되기는 충분한 시간이지요. 혹시 모릅니까. 여기서 한 백년쯤 더 지나면 그땐 이십만이 아니라 백만대군을 종횡무진했다고 전해지게 될지."

"쓸데없는 소리."

"쓸데없지 않습니다 장군. 우리에겐 전설이 필요하니까요. 전설이 있어야 그걸 보고 꿈도 꾸지 않겠습니까."

"......"

"일테면 말입니다. 여기 이십만 대군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한손으로 쓸어버릴 수 있는 분이 한분 계신다 하면, 앞에서나 뒤에서나 다들 꽤나 마음 든든해지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인지는 알겠으나 그래도 역시 불편하다. 타고난 성격이 실질 이상으로 부풀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장판에는 나 혼자 있었던 것이 아니네. 다리 앞에는 장장군이 있었고 뒤에서는 한수를 타고 관장군이 달려왔었네. 둘 중 한분만 없었어도 나는 그 날 장판벌에 시체가 되어 누웠을 것이야."

"하지만 지금은 장군 혼자 계시지요."

등지는 여기가 이십년 전 그 때와 같다고 말하려는 것일까. 좁은 퇴로로 몰려드는 많은 무리와 그 뒤를 쫓는 적군.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잔도 입구가 장판교쯤 되려나. 하지만 지금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등지의 말마따나, 너른 골짜기의 전장 안에, 오직 나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나밖에 없다는 건가."

"물론 여기엔 저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설은 장군님만이 가지고 계시죠. 지금은 말입니다."

등지가 짐짓 고개를 모로 꼬며 말했다.

"그러니 다른 전설이 생겨줄 때까지는 힘내주셔야죠."

"자네는 물에 집어던지면 혓바닥만 둥둥 뜰 것이야."

어울리지도 않게 독설 비슷이 흉내내어 보았지만 등지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 그저 웃어넘겼다. 겸연쩍음을 느끼면서도 지금 해야 할 일을 위해 창을 집어들었다.

"자네도 슬슬 준비하게." 

전장이 변하고 있었다. 제 1진은 예정대로 버텨줬다. 이제 여유를 둔 채 2진으로 방어선을 옮기고, 이들에겐 휴식을 준 뒤 제 3진을 구축하게 할 때였다. 퇴각의 징이 울리고 아군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려운 점은 여기서부터였다. 퇴각하는 제 1진이 상대편에게 꼬리를 잡혀 유린당한다면 모든 것이 어그러지게 되는 것이다.

예상대로 위군은 순식간에 목책을 걷어내고 추격해 오기 시작했다. 때를 같이하여 창을 비껴들고 말을 달려 박차고 나갔다. 직속부대를 거느리고 추격군의 선봉을 후려치자 적의 기세가 눈에 띄게 둔해졌다. 주력이 계산된 위치까지 퇴각한 것을 확인하고 직속부대의 맨 뒤에서 적진을 노려보며 서서히 물러났다.

몰려오는 적군 내부에서 순간순간 지대(支隊)들이 튀어나와 추격을 시도했지만 그 때마다 달려나가 대열을 흔들어 더 쫓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렇게 매번 격퇴당하면서도 새로운 부대를 쉼없이 연달아 내보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추격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나가는 끈기는 분명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위군의 지휘관인 조진은 확실히 나름의 기량을 갖춘 듯 했다.

이 끈덕진 추격이 조금만 더 길게 이어졌다면 이쪽의 피로와 소모도 누적되어 슬슬 위험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군의 선봉과 아군의 후미 사이에서 소소한 추격과 격퇴가 반복되는 동안, 양 군의 접전구역은 이미 아까보다 훨씬 더 깊숙한 데까지 물러와 있었다. 적의 선봉은 이제 아군 2진의 사거리 안까지 들어와 있었다. 생생한 제 2진에서 빗발처럼 내리붓는 화살에 위군의 추격은 다시 한 번 주춤할 수밖에 없었고, 그 사이 제 1진은 무사히 2진의 진문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들에게 제 3진 구축의 임무를 주어 뒤로 보내고 2진의 방어를 준비했다. 

첫 지연전은 이렇게 끝났다. 하지만 아직 시작일 뿐이었다. 깔때기가 다 빌 때까지는 아직 더 시간이 필요했다. 방어선 하나를 더 내주고 제 3진으로 설정한 지역까지 물러나고 나서야 어둠이 깔려 전투가 그치고 간신히 창을 손에서 완전히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피로를 내비쳐도 될 만할 때는 아니었다.



-절대평범지극정상인-

by windxellos | 2015/12/03 12:08 | 삼국지 | 트랙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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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기곡의 바람 -본편 3-
기곡의 바람 -본편 2- 조진은 약간 초조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아군은 아직까지 승세를 타고 있다고 해도 좋았다. 적의 첫 방어진은 그리 큰 어려움 없이 돌파했다. 돌파 후 첫 추격전 때 나름 세심하게 부대 출동 순서를 지정해 가며 계속 이어간 추격이 적이 준비한 내부 방어선 때문에 잠시 꺾였던 것은 좀 아쉬웠지만, 그 내부 방어선도 그리 오래지 않아 돌파할 수 있었다. 그 날은 날이 저물어 거기에 그쳤지만 다음 날&......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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