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곡의 바람 -본편 1-

기곡의 바람 -도입편- 에서 이어집니다.

사실 제가 조조에 대해 실제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여기서 묘사된 것과 좀 다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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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이 방어진을 정비하고 얼마 되지 않아 조진의 대군이 닥쳐왔다.

좁은 전장인 만큼 기본적인 전술은 단순했다. 전면공세를 가장하기 위해 전면에 넓게 펼친 것처럼 해 두었던 진영들을 전부 거둬들이고 뒤로 물러나 정면을 가능한 한 좁히는 것이다. 다만 적이 파고들 만한 측면이 생기지 않도록 접적하는 정면은 양 편에 절벽을 끼고 기곡구의 골짜기를 꽉 채워 늘어설 필요가 있었다.

어려운 부분은 어느 선에서 '정면'을 설정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었다. 정면이 될 골짜기의 너비는 좁을수록 좋으니 기곡도의 입구에 가까운 곳까지 후퇴할수록 좋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후퇴하면 이동에 시간을 잡아먹어 진영을 제대로 정비하기 전에 추격군이 도달할 것이다. 반대로 너무 덜 물러나면 여유시간은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넓은 정면을 막아야 하니 방어진의 두터움이 얇아질 것이다.

고심 끝에 지점을 선정하여 목책과 급조 망루를 세워 대략의 방어를 준비한 것이 조진군의 도착 직전이었으니 아슬아슬하게 가장 좋은 지점이었으리라. 그동안의 전장 경험이 쓸모없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일단 부상자와 치중을 아울러 선발대로서 먼저 기곡도로 들어가게 했다. 급하게 궤주하는 경우라면 물자를 뿌려 적의 발을 묶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었겠으나, 그렇게는 하지 않기로 정한 바였다. 앞으로의 긴 싸움을 위해서라도 어디까지나 역적에 대한 당당한 정벌 후의 유유한 퇴각으로 끝낼 셈이었다.

퇴각 선발대와 관련된 일은 등지에게 맡겼다. 좁은 길로 들어갈 대량의 치중과 다수의 병력을 개별 단위로 분류하고 각 단위의 중요도와 우선권을 판단하는 일이다. 그 자체로도 간단치 않은 일이고, 퇴각이라는 사태로 인해 신경이 곤두선 사람들 사이에서 소위 '살 길'로 누가 먼저 가고 누가 나중 갈지를 정해서 납득시켜야 하는 일이니만큼 보통의 신경줄로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겠지만, 실력과 아울러 밉살맞을 정도의 유들유들함을 가진 사람이니만큼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휘하 후발대 병력의 절반을 떼어 뒤쪽에 제2 방어진을 위한 시설을 구축하고 미리 준비해 두도록 했다. 후발대를 크게 두 부대로 나누어 교대로 방어진을 겹겹이 구축해가며 최대한의 시간을 버는 동시에 상대의 소모를 강요할 예정이었다.

하늘에서 본다면 위군에 대치하는 정면에서 기곡도 입구까지 이어지는 아군의 진영은 마치 커다란 깔때기 같은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지금쯤이면 깔때기의 출구에 해당되는 기곡도의 좁은 입구를 통해 퇴각하는 군의 선두가 막 빠져나가기 시작할 즈음이 아닐까. 자신이 만든 거대한 깔때기가 모두 빌 때까지 그 입구를 막는 아군의 정면이 버틸지, 혹은 그 전에 자신이 있는 깔때기의 입구가 돌파되어 안쪽이 헤집어질지, 결국 승부처는 그 부분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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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은 아침 일찍 대군을 이끌고 출격했다.

벼락같은 기세로 앞에 늘어선 적군의 진영들을 휘몰았지만 이미 전부 비어 있었다. 사실 개중 절반 이상은 사용한 흔적조차 없는 것으로 보아 원래부터 비어 있던 것 같았다. 일단 보고에 따르면 그랬다.

처음에는 사냥꾼의 심정으로 피가 끓어올랐던 조진이었지만 빈 진영만을 부수며 가다 보니 어쩐지 서서히 흥이 식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드디어 적군이 실제로 늘어선 긴 진채가 전방에 나타났을 때는 오히려 완전히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화살 한 바탕보다 좀 먼 거리에서 적진을 관찰해 보니 적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사이의 좁은 골짜기를 양쪽으로 꽉 메우고 있었다. 측면을 잡을 수 없어 조금은 성가실 것 같았다. 하지만 물러나는 데 급급할 것이 분명한 이상 기세는 여전히 아군이 앞설 것이다. 게다가 미에서 대치할 때보다 병사가 줄었는지, 어쩐지 목책 뒤 진형의 두께도 예상보다 얇은 듯했다. 부대를 나누어 전면에 교차로 파상공격을 가하면 어렵지 않게 뚫을 수 있음직해 보였다. 

무의식중에 나즈막한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정(正)과 기(奇). 인가."

지금은 가고 없는 태조께서 특별히 배려하시어 승상부와 위왕부를 거치며 그럭저럭 붙여살던 동안, 그분은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자신에게도 종종 종군을 명하며 병법을 가르쳐주곤 했었다.

"기책이란 건 말이다."

그 때 그분은 머리를 한 팔로 괴고 삿자리에 반쯤 누운 채로 말을 꺼냈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서역에서 진상된 포도를 송이째로 들고 하나씩 뜯어먹는 중이었다. 승상쯤 되는 분의 체신머리로서 도무지 점잖다고는 하기 어려운 자세였지만 자신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에게는 사석에서 종종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뭐, 잘 먹히면 크게 한탕 할 수 있지. 하지만 이게 뭐 할 때마다 잘 먹히는 것도 아니고."

풉 하고 그릇에 포도씨를 뱉으며 말을 이었다.

"잘못 걸리면 안 하느니만 못하지. 양쪽에 날이 선 칼 같은 거야. 결국 제일 좋은 건 정(正)이지. 그걸로 찍어누르는 거야."

"하지만......"

'당신께서는 기책으로 크게 이겨오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것까지 다 예상했다는 듯이 대답이 먼저 나왔다.

"내가 기책을 쓰는 건 결국 늘 정(正)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을 때 뿐이라. 그래. 관도에서 원소 놈이랑 붙었을 때처럼 말이지. 여하튼 정말 필요할 때가 아니면 기책 따위에는 의존하지 않는 게 좋아."

"......"

"옛다."

다 먹은 포도송이를 내버리고 새 송이를 집나 싶더니 느닷없이 이쪽으로 포도송이를 던졌다. 놀라서 황급히 받아들며 고개를 숙이는 나를 보고 빙긋 웃으며 그분은 말을 이었다.

"이럴 때나 막 써도 쓸모있는 거지. 알겠느냐 자단. 제일 좋은 건 기책 같은 걸 쓸 필요가 아예 없는 상황을 만드는 거야. 명심해라. 그게 최선이야."

그 때는 그냥 그런가 하고 넘어갔지만 지금 그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좁은 골짜기에서 대치하는 양측의 군세. 측면은 없이 오로지 정면 뿐이다. 우리도 기책을 쓸 수 없지만 상대 또한 마찬가지다. 오로지 정(正)과 정(正)의 싸움. 그리고 지금 나의 정(正)은 상대를 능히 제압할 수 있다. 그렇다. 지금이야말로 기책 따위는 쓸 필요조차 없는 상황. 그야말로 최선의 상황이 아닌가.

행군하는 동안 식어 적진 앞에서 냉정하게 공격 방책을 계산하던 머리가 승산을 포착해 내자 이윽고 가슴으로부터 서서히 다시 뜨거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들어라!"

근래 들어 한껏 더 비둔해진 몸을 자리에서 벌떡 일으켰다. 명제께서 살아계실 무렵 오질 녀석이 살집을 두고 깝죽거렸을 때는 그대로 쳐죽여 버릴까 싶을 정도로 기분이 나빴었지만, 지금 와선 오히려 장수로서의 관록과 무게감을 더해주는 것 같아 꼭 나쁘지도 않은 것 같았다. 정(正)이란 것도 원래 날렵한 것보다는 둔중하고 듬직한 것에 깃드는 법 아니겠는가.

자신의 외침에 일제히 모여드는 시선을 느낀다. 주변의 제장들을 중심으로 진 끝자락까지 널리 퍼진 모두에게서 날아드는 수많은 시선. 그것에 답하듯이 소리높여 외친다.

"이 싸움은 질 수가 없는 싸움이니라! 하늘의 때가 우리에게 있으며 땅의 리도 우리에게 있으며 사람의 정예함도 우리에게 있느니!"

높아가는 외침에 부응하듯이 본영 뒤쪽의 고수가 북채를 한층 더 높이 치켜들었다.

"쳐라!"

지휘채를 힘차게 내리친다. 맹렬한 공격을 명하는 북소리가 아찔하게 울리는 가운데 선봉대가 기세를 올리며 힘차게 적진으로 돌격해 나가기 시작했다.



-절대평범지극정상인-

by windxellos | 2015/12/03 12:07 | 삼국지 | 트랙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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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기곡의 바람 -본편 2-
기곡의 바람 -본편 1- 전투는 격렬했다. 승세를 타고 밀려오는 위군의 공세는 드셌고, 남긴 병력만으로 이들을 맞이하여 싸우는 것은 예상대로 꽤나 힘겨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다들 잘들 싸우고 있군요." 지휘에 골몰한 조운의 등뒤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발대로 보냈던 등지였다. 돌아보는 조운과 눈이 마주치자 등지가 말을 이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얄미울 정도로 느긋한 말투였다. "선발대 쪽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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