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곡의 바람 -도입편-

어쩌다 말이 씨가 되는 바람에 또 쓰게 된 잡문입니다.

이번에는 개그가 아닌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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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등잔이 어스름히 서안 주변만을 비추는 밤의 군막 안에서 조운은 다시 그 서찰을 집어들었다.

재삼 다시 읽어도 그 내용은 변함없었다. 1각쯤 전에 보고를 듣고 내보낸 전령의 복명도, 몇 번을 되풀이하여 읽은 서찰의 내용도, 모두 같은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가정에서 마속이 대패. 위군이 가정 길목을 돌파. 본군은 한중으로 퇴각 중. 마속은 도주를 시도하다 체포.'

믿고 싶지 않지만 사실일 것이다. 평소 마속의 재기(才氣)를 낮지 않게 평가하던 조운으로서는 정예병을 거느리고 적보다 먼저 길목을 장악하고 있었으면서도 이렇게 순식간에 돌파당한 것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전장이란 본래 변화무쌍한 것, 무슨 일이든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억지로나마 납득해 보기로 했다. 아마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으리라.

당면한 문제는 바로 이곳이다. 가정을 비롯한 일련의 기동으로 인해 위군은 기산 측의 병력이 아군의 본군임을 완전히 파악했을 것이다. 이쪽이 숫자만 적당히 채웠을 뿐 전투력은 떨어지는 의병(疑兵)이라는 것도 포함해서. 그리고 가정이 돌파되고 아군의 본군이 퇴각하게 된 이상, 미(媚)에서 이쪽과 대치하고 있는 조진에게는 더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을 것이다. 아마 전력을 다해 공격해 오리라.

"으음."

잠시 낮은 신음을 흘리며 생각해 본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퇴각이다. 당연하다. 본군이 퇴각한 이상 의병인 이쪽이 남아있다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마속이 패배한 순간 북벌은 실패로 끝난 것이다. 퇴각해야 한다. 그러나 그저 '퇴각' 이라는 한 단어로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길어질 것이다."

무심결에 중얼거리고 나서 깨달았다. 그렇다. 이 싸움은 이제 길어질 것이다. 이번 북벌의 실패로 기습의 이점은 잃었다. 앞으로는 우리의 수 배에 달하는 국력을 가진 위나라의 '준비된' 방어체계와 싸워야 할 것이다. 아마도 단시간 내에 결판을 내기는 어려우리라.

그렇다면 앞으로는 패배의 결과로 패배해서는 안 된다. 양 국의 국력차가 절대적인 이상, 맞붙어 싸웠을 때 같은 피해, 아니 설령 두 배 세 배의 피해를 위군에게 입히더라도 먼저 고갈되는 것은 아마도 이쪽일 것이다. 전황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자주적으로 퇴각할 수는 있어도, 접전에서 대패하여 다수가 전몰하거나 귀중한 물자를 대량으로 망실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길어질 싸움을 버틸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지금, 여기서부터 그것을 시작해 나가야 할 것이다. 기산으로 나간 승상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대군의 퇴각전은 아마도 처음 겪을 테지만 그만큼 주밀한 사람이니 적어도 사람은 제대로 살려서 올 것이다. 그렇다면 이쪽도 응당 그에 호응해 주어야만 한다.

퇴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궤주해서는 안 된다.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모든 것을 보존하여 정연하게 퇴각하는 것. 그것이 앞으로의 대계를 위해 지금 해야만 할 일이다. 사람도 물자도, 그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위군에게 내줄 수는 없다.

"그러나."

낮게 혼잣말을 해 본다.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문득 어깨가 살짝 결려왔다. 전장에서 늘 잠옷 삼아 입고 있던 단갑(短甲)이 살짝 어깨죽지를 파고든 탓인 것 같았다. 수십 년을 그리 해왔기에 이제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것과 같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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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들뜨지 마라. 방심하지 말고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조진은 공격을 준비중인 진중을 순시하며 벌써 다섯 차례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딴에는 부하들을 진정시킨다고 하는 말이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이 느끼고 있는, 시시각각 부풀어오르는 고양감을 내색하지 않으려는 탓도 있다. 사실 절반쯤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지난 새벽에 온 소식은 짤막하지만 실로 고무적인 것이었다.

'장합, 가정 돌파.'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조진은 이것도 모두 황제의 홍복이라며 막사 안에서 전령과 함께 황제가 있는 방향을 향해 절하고 만세를 불렀다. 실로 천명이 위나라를 돌보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던 것이다.

사실 그 동안은 너무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애당초 조운의 양동에 속아 기산으로 오는 적군을 감지하지 못하면서 처음부터 일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한번 어긋난 것은 계속 어긋나, 제갈량이 3개 군을 집어삼키는 사이 자신은 대치하고 있는 조운에게 못박혀 미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기산 방면 요격을 위해 출동한 장합으로부터 가정이 적에게 선점되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는 그야말로 과장 없이 눈앞이 캄캄해졌었다. 적군이 가정의 애로에서 길목을 막고 방어로 일관한다면 이를 단시간 내에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기산으로 빠져나온 제갈량의 대군이 한동안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이젠 사실상 막을 방도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가정이 순식간에 돌파되었다. 장합이 듣던 것 이상으로 엄청난 군재를 가지고 있었거나, 혹은 가정을 지키던 적장이 상상 이상으로 아득히 무능한 자이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니겠나 싶었지만,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지금 아군이 가정 길목을 돌파한 상태라는 점이었다. 눈앞이 확 밝아지는 것만 같았다.

가정이 돌파된 이상, 제갈량이 바보가 아니라면 기산 방면의 적군은 알아서 퇴각할 것이다. 서량 방면의 여유병력이 적어서 뒤를 제대로 후려칠 수 없는 것은 아쉽지만 어쨌거나 이쪽을 더 위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일은 하나다. 기곡구로 나와 진을 치고 있는 눈앞의 적군을 노도와 같이 들이쳐서 섬멸하는 것이다. 도주하려는 적군의 뒷덜미를 사정없이 들이쳐서 다시는 고개를 쳐들고 나올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짓부숴 버리는 것이다.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아군은 적을 밀어내고 적은 밀려서 도망쳐야 하는 싸움이니 기세가 다를 것이다. 또 기곡구로 나온 적들의 유일한 후방 도주로인 기곡도는 좁은 잔도이다. 도망가야 할 적의 수에 비해 도망갈 길이 너무나 좁아 한동안은 닫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적의 정예가 대부분 기산 쪽 부대에 있다는 것도 이미 파악했다. 눈앞의 적군은 나를 여기 묶어두려는 허장성세를 위해 숫자만 채웠을 뿐 질적으로 내 휘하 정예병의 상대는 못 될 것이다.

이 싸움에 관여하는 천, 지, 인 모두가 지금 아군의 절대적 우세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승기는 이미 나에게 있다. 남은 것은 얼마나 더 크게, 얼마나 더 성대하게 이기느냐 하는 것일 뿐이다.

눈앞에 밝아오는 아침햇살이 실로 눈부시기 이를 데 없었다.



-절대평범지극정상인-

by windxellos | 2015/11/13 23:47 | 삼국지 | 트랙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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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절대평범지극정상인의 얼음집 at 2015/12/03 12:07

제목 : 기곡의 바람 -본편 1-
기곡의 바람 -도입편- 조운이 방어진을 정비하고 얼마 되지 않아 조진의 대군이 닥쳐왔다. 좁은 전장인 만큼 기본적인 전술은 단순했다. 전면공세를 가장하기 위해 전면에 넓게 펼친 것처럼 해 두었던 진영들을 전부 거둬들이고 뒤로 물러나 정면을 가능한 한 좁히는 것이다. 다만 적이 파고들 만한 측면이 생기지 않도록 접적하는 정면은 양 편에 절벽을 끼고 기곡구의 골짜기를 꽉 채워 늘어설 필요가 있었다. 어려......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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