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으며 부인 말씀도 옳소이다.

시집살이
치오네님 블로그에서 트랙백.

저 글을 읽으니 문득 어린 시절 일 하나가 떠올라서 적어봅니다.

제가 초등학교 저학년 즈음이었나 했을 텐데, 뭐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TV에서
드라마를 하나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도 고부갈등은 드라마의 주요 소재였고, 마침 심술많고
성격 나쁜 부자 시어머니가 가난한 집에서 시집온 불쌍한 며느리를 마구마구 구박하는 장면이었죠.
사이에 낀 남편은 어물어물하다가 시어머니 등쌀에 밀려 그냥 빠져버렸고요.

어린 마음에 시어머니도 참 나쁜 사람 같고 남편으로 나오는 사람도
어물어물하다가 어물쩡 꼬리 내리고 도망가기만 하는게 영 마뜩찮아서

"난 저렇게 되면 당당하게 부인 편 들어줄 거에요." 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직후 어머님 반응이 의외였던 것이, 바로 아까까지도
저랑 같이 TV 보면서 '시어머니 참 나쁘네' 하시다가 제 말을 듣고는

"얘 큰일날 애네. 그럼 안되지!" 라고 하시는 겁니다.

왜 안되느냐고 물었더니 어머님 말씀이

"아무리 그래도 저기서 대놓고 며느리 역성을 들면 되냐? 저기서는 먼저 어머니
다 옳습니다 하고 며느리는 나중에 방에 들어가서 다독다독 해줘야지"
라고 하셨죠.

이해가 안 가서 왜 그러냐고 재차 물어도 그게 당연한 거라고, 그 때는
분명 젊은 며느리 입장이었을 어머니는 단호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그 어떤 일이든지 잘 살피기만 하면 명명백백 모든 일의 시비를 사람이 가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시비만 정확하게 가려지면 누구라도 납득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고
순진하게 믿고 있던 어린아이는 아무리 시어머니가 잘못한 것이더라도 그 자리에서 바로 시비를
가려서 나쁜 시어머니를 공박하면 안 된다는 어머님의 말씀이 영 납득이 가지 않았더랬습니다.

나중에 머리가 굵어지면서 어린아이 시절의 믿음이 꼭 그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고,
소위 '고부갈등' 관계에서의 시어머니도 며느리와 같이 사람이며 또한 여성이고,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일종의 경쟁관계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듣게 되고 하니 그 때에서야 어머님
말씀이 쓸데없는 다툼을 줄이는 데는 오히려 더 나은 방법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됐었지요.

황희 정승의 유명한 일화로 '네 말도 옳고 네 맗도 옳으며 부인 말씀도 옳소이다' 하는 것이 있었는데,
역시 처음 읽었을 때 초등학생의 어린 머리로는 저것이 대체 뭐가 지혜라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었죠.

아마 어머님 말씀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아니었나 합니다. 누구에게도 가급적 상처나 손해를
입히지 않고 다툼을 줄이거나 끝낼 수 있다면 그 또한 훌륭한 지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지요.(후룩)




-절대평범지극정상인-

by windxellos | 2009/01/15 15:13 | 기타잡담 및 잡상, 독백 | 트랙백(1)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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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절대평범지극정상인의 얼음집 at 2009/01/16 00:52

제목 : 부연 설명.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으며 부인 말씀도 옳소이다. 이 글에 대해서 질문하는 분도 있고 해서 가볍게 부연 설명. 그러니까 어린 시절 연속극을 보면서 나쁜 시어머니에게 구박받는 며느리를 보며 제가 "난 저렇게 되면 당당하게 부인 편 들어줄 거에요." 라고 말하니까 어머님께서는 "얘 큰일날 애네. 그럼 안되지!" 라고 하신 뒤 제 질문에 "아무리 그래도 저기서 대놓고 며느리 역성을 들면 되냐? 저기서는 먼저 어머니 다 ......more

Commented by 저거노트 at 2009/01/15 15:17
흐음... 확실히 저런 것도 지혜가 될 수 있겠지요.
Commented by windxellos at 2009/01/16 00:39
다툼의 여지를 줄인다는 점에서는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狂猫 at 2009/01/15 15:59
역시 어머님의 삶의 지혜...
Commented by windxellos at 2009/01/16 00:39
아이들은 모르는 거죠.(먼산)
Commented by 떠리 at 2009/01/15 16:52
전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어머님은 가족,친척, 기타 모든 사람들이 편을 들어 줄 수 있지만..
시집온 아내는 오직 자신. 즉 남편 하나만 믿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그룹에 혼자 던져진 겁니다.
그런데 남편까지 아내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면(적어도 보는 데서라도) 아내의 심적 충격과 부담은 더 커지지 않을까요?
저라면... 일단은 아내편을 들어주고 진정되고 둘이 있을때 어머님의 입장도 생각해 보라 라고 대화를 나눠 보겠습니다.
물론 어머니 에게는 미리 이렇게 할 꺼다 라고 말씀 드리지 않는다면 역시나 어머님의 배신감도 크겠죠.
Commented by windxellos at 2009/01/16 00:40
어머님은 그러니까 그 '역성'을 다른 쪽에 상처를 주는 방향으로 들게 되면 곤란해진다는 말씀이었죠.
Commented by 떠리 at 2009/01/16 09:05
집에다가 얘기를 해 봤는데 역시나 윗 글과 같은 반응을 보이시더군요.
결론은 그냥 가만히 있어라. -_-a
Commented by windxellos at 2009/01/16 11:37
그렇다고 어떤 시비도 가리지 말고 손 놓고 있으라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다만 둘이 있는 상황에서 대놓고 공박해서 '공개 면박'을 줄 경우 오히려 싸움이
커질 가능성이 있으니 꼭 시비를 가릴 일이 있다면 시어머니와도 또 따로 조용히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 자리에서 공박하는 것보다 오히려 낫다는 맥락이 되겠죠.
Commented by 스폴 at 2009/01/15 23:20
이거 좀 해결하기 힘든 문제인듯 싶은데요..;;
Commented by windxellos at 2009/01/16 00:40
뭐, 상의해서 결정하는 것도 방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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