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운대가 잘 맞아서 오늘 전야제를 보고 왔습니다.
'서'에서 7할쯤 진심으로 '안노가 결혼하더니 많이 둥글어진 것 같다. 역시 사람은 가정을 가지면 변하는 건가' 라고 생각했었고, '파'에서는 몇 가지 께름하게 걸리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서'에서의 이미지도 있고 해서 그럭저럭 열혈 신지를 재미있게 볼 수 있었습니다만, 이번 'Q'를 보니 딱 드는 생각은
그냥 이거였습니다. 정말 '急'스런 느낌.
아무튼 간만에 감상을 적어보긴 하겠는데, 어차피 제가 딱히 에바 많이 들이판 것도 아니고 애당초 덕력 성분 자체가 부족한 터라 그냥 그자리에서 보고 느낀 단상 위주로 두서없이 적어보게 되겠군요.
이후로는 대량의 스포일러가 나오니 미리 주의를 드립니다.
일단 처음 드는 생각은 '신지 참 불쌍하다' 였습니다. 정말 비참하게 구르더군요. 물론 신지가 시궁창스런 상황에 빠지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닙니다만, 신극장판 이전의 신지가 주변 상황에 치이고 밀려가다가 결과적으로 시궁창에 빠지는 전개였다면, 이번 신극장판의 신지는 나름대로 결론을 내고 능동적으로 선택지를 골라서 한 일이 결국 세계 규모로 시궁창스런 결과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경우가 좀 다르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파'에서 많이들 열광했던 그 열혈 신지, 그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니어 서드 임팩트였죠. 신지의 성장의 결과처럼 보였던 일이 결과적으로는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던 셈이니 말 다한 셈입니다. 물론 신지는 신지 나름대로 억울할 수밖에 없겠죠. 작중에서 본인 입으로도 그렇게 말하고요. 까놓고 말해, 신지라고 그게 그렇게 될 줄 알고 그렇게 한 건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 사건으로 피해를 본 사람 입장에서 보면 또 그게 그렇지가 않지요. 초반에 분더의 크루들은 대부분 신지를 상당히 적대적으로 대하는데, 아무리 의도가 좋았다 한들 다들 그 사건으로 주변이 파괴되고 개인적으로도 고생했을 테니 이건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오히려 그 건으로 오빠가 죽었을지도 모를 사쿠라가 신지를 나름 잘 대해 주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지요. 마리 같은 에바 파일럿이야 내막을 다 아니까 그렇다 쳐도 말이죠.
그리고 주변의 냉대와 진실을 안 뒤의 절망으로 나락에서 뒹굴던 신지가 카오루의 격려로 마음을 다잡고 겨우 힘을 내서 전력으로 해낸 일의 결과는 포스 임팩트의 위기. 이쯤 되면 정말 안쓰러울 따름입니다. 이번 화에서 신지는 정말 끝없이 구르기만 하는군요. 깨어나 보니 상황은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보는 사람들마다 차갑게 대하는데다, 나중에 알게 된 진실은 참혹할 따름. 덧붙여 하는 일마다 결과적으로는 삽질.
거기다가 그나마 신경써 준다는 카오루도 제가 보기에는 어딘가 좀 께름한 느낌이었으니 말이죠. (딱히 신지에게 해가 될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목적을 위해 설명은 생략한 채 다소 성급하게 신지를 행동으로 몰아대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13호에 같이 탔을 때 신지가 '카오루는 뭐든 다 알고 있구나' 라고 말하는 게 순전한 감탄으로 들리지만은 않았던 건 저뿐일까요. 마지막에 신지는 카오루의 제지를 뿌리치고 창을 뽑아버리는데, 카오루가 타기 전에 조금만 더 찬찬히 제대로 사전설명을 해 줬다면 그걸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지기도 합니다.
다음은 미사토. 위의 분더 크루들 이야기에서 이어지지만, 미사토 역시 신지를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냉랭합니다. 더군다나 파의 마지막 부분에서 신지를 충동질(...)까지 했던 것까지 비교돼서 이래저래 좋지 않은 말을 듣는다는 것 같습니다만, 제가 본 바로는 글쎄요, 그리 비난받아야 할 처지 같지는 않습니다.
'Q'에서 신지가 미사토와 처음 대면하는 장소는 분더의 함교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했다시피 니어 서드 임팩트 건으로 신지는 이미 반쯤 '인류의 적' 쯤 되는 위치에 있죠. 그리고 그렇게 신지를 증오하는 브릿지 크루들의 눈이 전부 몰려 있는 상황. 이 상황에서 미사토가 예전처럼 신지에게 살갑게 대했다면 상황은 오히려 악화될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미사토가 그 자리에서 의도적으로 말투를 좀 차갑게 한 느낌은 있었습니다만, 따지고 보면 신지를 직접적으로 책하는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 때 한 말은 나중 상황에 비추어 보면 다 '맞는 말' 이었죠. 그 자리에서는 오히려 그렇게 대하는 편이 지휘관으로서는 나은 태도였지 않았나 싶습니다. 차갑게 대했다기보다는 차갑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야 할까요.
물론 상황의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신지는 네르프 쪽으로 가버리게 됩니다만 이것도 미사토에게만 책임지우기는 뭣한 것이, 시간상 뭘 제대로 설명을 해 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첫 대면시에는 인공사도가 쳐들어와서 막느라 정신이 없었고, 나중에 좀 찬찬히 설명을 할 수 있겠구나 하던 시점에 곧바로 복제 레이가 쳐들어와서 신지를 들고가 버리죠. 신지의 행동은 신지 입장에서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지만, 뷜레 쪽에서도 제대로 설명을 해줄 여유가 없었다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신지가 레이를 따라가던 두 번째 대면 신에서 미사토의 태도는 오히려 안쓰럽게 보일 지경인데, 아시다시피 '파'에서 신지의 폭주로 촉발된 건 니어 서드 임팩트라는 대참사. 이건 신지의 멘탈붕괴를 우려해서 카오루도 본인이 알려고 할 때까지는 굳이 알려주려 하지 않은 진실이었습니다.
두 번째 대면 신에서 미사토는 신지에게 네르프로 가지 말라고 하기 전까지 거의 말을 하지 않는데, 아마 본인도 '파'에서 폭주하는 신지를 격려까지 해줬던 입장에서 무엇을 뭣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사실 사라지는 신지를 보면서도 결국 기폭 스위치를 누르지 못하는 장면에서 대사 없는 미사토의 심정은 대략 묘사가 됐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미사토가 기폭스위치를 눌러서 카오루를 죽였다'라는 모 님의 설은 성립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실 미사토의 생각이 어쨌건간에 미사토가 카오루를 폭살시키는 상황은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 복선이라긴 뭐하지만 신지가 네르프로 가는 부분에서 에반게리온 9호기가 뛰쳐나간지 겨우 몇 초 되지도 않아서 미사토가 쥔 기폭장치의 상태창에 떠오른 글씨는 'OUT OF RANGE'로 바뀌어 버리거든요. 그 정도 신호도달거리로는 멀리 떨어진 분더에서 스위치를 누른들 센트럴 도그마 맨 아래까지 파고들어간 에반게리온 13호기에까지 기폭신호가 닿을 것 같지는 않더군요.
그렇다면 대체 왜 카오루가 죽었느냐가 문제인데, 처음에는 그냥 카오루의 자폭인가 했습니다만 집에 오면서 다시 장면 흐름을 떠올려보니 가프의 문이 열린 시점에서 초커는 이미 활성화되어 있었죠. 초반에 나온 리츠코의 대사로 미루어 보면, 해석하기 나름이긴 합니다만 아마 굳이 기폭스위치를 수동으로 넣지 않아도 임팩트나 그에 준하는 상태가 오면 알아서 초커가 활성화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스위치로 즉시 폭살이 가능했던 것처럼 묘사됐으니 이게 지효성은 아닐 듯하고, 아마 카오루가 신지에게 유언(?)을 남기는 동안 활성화 상태에서 어떻게든 작동을 막고 있다가 할 말 다하고 자연스럽게 작동 막던 걸 풀어서 폭사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카오루가 맘대로 풀었다 끼웠다 할 수 있는 걸 보면 어느 정도 컨트롤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다만 하나 묘한 건, 그걸 풀어낸 시점에서 내다버리든지 하면 됐을 걸 왜 굳이 목에 끼워서 죽었느냐 하는 점일 텐데, 그 시점의 카오루는 겐도의 노림수를 몰랐을 테니 다 잘 풀릴 거라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카오루가 그렇게 죽었기에 포스 임팩트를 막을 수 있었던 거기도 하고요.
아스카의 경우, 스토리상 비중이 크진 않지만 활약이 확 늘었는데다, 마지막에서는 그야말로 히로인 쟁탈전 최종 승자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만 신지에게 계속 (14년이나 지났는데)'여전히 애' 라는 식으로 말하는 부분이 좀 거슬렸는데, 신지는 사실 애 맞거든요.
아스카야 그 일 이후로도 14년간 이런저런 일을 겪고 정신연령은 28세가 되었지만, 신지의 시간은 '파'의 시점에서 멈춰 있습니다. 그러니까 몇 년이 흘렀든 그냥 14세짜리 애죠. 그런데도 그 동안 성장하지 않고 뭐했냐는 식으로 매도하면 참 뭐라 해야 할지. 다만 그 대사를 반복시키는 걸 통해 신지가 '애'라는 걸 각인시키려는 것이 감독의 의도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사실 아스카도 그리 28세답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건 외모 탓도 있겠습니다마는.
마리는 계속 서포트로만 돌면서 개그나 츳코미를 주로 담당한다는 느낌이었습니다만, 막판에 신지의 엔트리 플러그를 뽑아냄으로써 '제레의 보험'을 날려버리고 포스 임팩트를 막는 데 카오루와 함께 중요한 일익을 담당합니다. '파'에서 임팩트있던 등장에 비해 정작 본편 활약이 적었던 걸 생각해 보면 나름 장족의 발전. 그나저나 이전의 아야나미를 꽤나 잘 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던데, '파'에서 둘이 그렇게 자주 접할 기회가 있기는 했던가 싶은 느낌도 드는군요.
어쨌거나 결론은 '신지 참 불쌍하다' 입니다. 고생고생하다 깨났는데 사람들은 다 차갑게 대하지, 뭐 설명도 제대로 안 해주지, 잘 했다고 생각했던 일은 전 지구급 민폐였지, 그나마 아야나미는 살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지, 마지막으로 좀 잘 해보려던 일은 역시나 또 전 지구급 민폐가 될 뻔 했지, 친구라고 마음붙인 녀석은 눈앞에서 폭사해 피와 살점 덩어리가 돼버렸지, 그야말로 끝도 없습니다.
이건 뭐 막판에 그렇게 반 폐인이 돼서 엔트리 플러그에 쭈그려 앉은 모습을 봐도 나쁘게 말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질 않더군요. 그쯤 되면 누구라도 그렇게 되지 싶습니다. 그런 일을 연달아 당하고도 멀쩡하게 헤헤 웃는 사람이 있다면 그쪽이 오히려 이상한 거겠죠. 그러니까 아스카, 그렇게 신지 너무 몰아대지 말란 말이다.(...)
뭐 이런 것들과는 별개로,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움직임에는 여러 모로 감탄스런 부분이 많았습니다. 특히 초반 지구 궤도에서의 전투는 참 대단하더군요. 그나저나 전투 들어가기 전에 이래저래 로켓 장비 조작하고 하는 시퀀스를 보고 있자니 왠지 뭐랄까 기분이 묘해졌던 게, '오네아미스에서의 한을 여기서 푸는 거냐' 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쳤던 제가 좀 과민한 걸까요. 으음.
아, 그나저나 신지 참 불쌍하네요. 다음 극장판에서는 제발 좀 사정이 나아지길 바랄 따름입니다.
-절대평범지극정상인-
P.S : 그러고 보면 얼핏 선악이 혼잡스레 뒤섞여 있는 것 같은 이 작품에도 딱 하나 일관되어 보이는 듯한 법칙이 있는데, 그건 바로 '뭐가 됐든 겐도의 말대로 하면 무조건 막판은 폭망하는 전개로 간다' 입니다. 이번 'Q'에서도 예외없더군요. 과연 최종보스라고 해야 할까요.